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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명 규모는 정보 기술이 결정했다.
음성 언어: 부족의 탄생
10만 년 전, 음성 언어가 나타났다. 영장류는 서로 털을 골라주며 유대를 유지했지만, 이 방식으로는 150명이 한계였다. 언어는 이 한계를 깨뜨렸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명에게 말할 수 있었고,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저 산 너머의 부족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한 마디가 수백 명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음성 언어는 부족을 만들었다.
1만 년 전, 농업이 시작되었다. 식량 잉여가 생기자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마을이 되고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도시는 부족과 다른 문제를 낳았다. 곡물이 얼마나 있는가. 누가 세금을 냈는가.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음성 언어만으로는 이 정보를 관리할 수 없었다. 말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누군가가 젖은 점토판에 쐐기 모양 기호를 새겼다. 곡물 자루의 수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문자다. 문자는 말이 할 수 없는 한 가지를 해냈다. 정보를 시간 위에 고정시킨 것이다. 기억이 아니라 기록에 의존할 수 있게 되면서, 관료제가 가능해졌고 법률이 가능해졌고 제국이 가능해졌다. 문자는 국가를 만들었다.
정보 기술이 만든 패턴
여기서 패턴이 보인다.
음성 언어는 정보의 실시간 전달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부족이라는 새로운 규모의 사회가 나타났다. 문자는 정보의 시간적 보존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국가라는 새로운 규모의 사회가 나타났다. 정보 기술의 혁명이 사회 규모의 혁명을 만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 번째 전환점에 서 있다.
자연어로 생각하는 AI의 한계
AI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정보를 처리하는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이 존재는 인간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다. 자연어로 입력받고, 자연어로 추론하고, 자연어로 출력한다. 매번 처음부터 생각하고, 그 결과를 버린다. 기록하지 않는다. 축적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문자 발명 이전의 도시와 같다.
도시에 수만 명이 모여 살지만, 모든 정보가 사람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상황. 곡물 재고를 매번 직접 세러 가야 하고, 세금 납부 여부를 증인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고, 법률이 장로의 말에만 존재하는 상황. 작동은 한다. 하지만 규모를 키울 수 없다. 효율이 한계에 도달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 문제를 문자로 해결했다. 말을 점토 위에 고정시켰다. 기억을 기록으로 바꿨다.
AI에게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
AI의 추론을 구조화해서 기록하는 체계. 한 번의 추론이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는 체계. 축적된 추론이 다음 추론의 토대가 되는 체계. 자연어의 모호함에서 벗어나, 출처와 맥락과 확신도가 명시된 구조화된 언어.
세 번째 언어의 설계
음성 언어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해 자연발생했다면, 문자는 정보의 관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발명되었다. 그리고 지금, AI의 추론을 관리하기 위한 세 번째 언어가 의도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음성 언어가 부족을 만들었고, 문자가 국가를 만들었다면, 이 세 번째 언어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아직 이름이 없는 그 규모의 문명을.